2024년 가장 인상 깊게 본 영화 한 편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파묘》를 말할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요즘 또 오컬트야?” 싶은 마음이었다. 《검은 사제들》 이후 몇몇 작품들이
나왔지만, 자극적이거나 신파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기에 별 기대 없이 보게 된 영화였다.
하지만 《파묘》는 달랐다. 이 영화는 단순한 공포를 넘어서, 한국인만이 공감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한 금기, 조상신, 풍수지리라는 무형의 신념을 날카롭고도 깊이 있게 파고든다.
줄거리
영화는 부유한 기업가 가문이 ‘가문의 저주’를 해결하기 위해 한 풍수사 팀을 찾으면서 시작된다.
그 집안 남자들이 모두 30대를 넘기지 못하고 의문사하는 기이한 패턴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민식이 연기하는 노풍수 김상덕과 그의 동료 박지용(유해진)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영적인 조력을 위해 신내림을 받은 무당 이화림(김고은), 그리고 무속계 실무자 봉길(이도현)까지
합류해 파묘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문제는 그 무덤이 단순한 조상의 무덤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둬두기 위해
만든 봉인의 무덤’이었다는 것이다. 무덤의 위치는 풍수적으로 매우 기이했고,
지맥이 뒤틀려 있었으며, 파묘가 시작되자 팀은 하나둘씩 이상한 현상에 휘말린다.
초자연적 현상, 환각, 환청, 그리고 악몽. 무당 이화림은
“이건 저주가 아니야. 경고야.”라고 말한다.
결국 팀은 자신들이 건드린 것이 단순한 망자의 원한이 아니라, 오래전 조상들이 목숨을 걸고
봉인한 금기의 존재였음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무언가가 풀려버렸고,
그것은 이제 사람들의 정신과 육체를 하나하나 갉아먹기 시작한다. 영화의 후반부는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혼과 생명, 뿌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무거운 메시지를 남긴다.
공포
요즘 공포영화는 대부분 갑툭튀(깜짝 놀라게 하기)로 승부를 보곤 한다.
하지만 《파묘》는 그렇지 않다. 진짜 무서움은 ‘이걸 건드려도 되나?’라는 본능적인
경외심에서 나온다. 무덤을 파는 장면 자체가 이미 한국인에게는 금기이자 공포다.
조상에 대한 예, 죽은 자에 대한 존중,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것이 영화의 배경에 스며들어 있다.
굿판 장면에서는 실제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허구라고 알면서도, 김고은이
입신한 모습에서 ‘신의 존재’를 잠시라도 믿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감독은 공포를
‘괴물’이 아니라, 우리 안의 믿음과 죄책감으로 표현했고,
나는 그것이 너무 무섭고도 아름다웠다.
최민식은 말이 필요 없는 배우다. 영화 내내 무게감과 긴장감을 단단히 붙잡아 준다.
오랜 세월을 현장에서 보낸 듯한 풍수사 연기는 감탄스러웠다. 유해진은 언제나처럼
친근하고 능청스러운 연기를 보여주지만, 이 영화에서는 더 진지한 모습이 많다. 그는
위기의 순간, 무속과 과학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매우 인간적으로 그려냈다.
김고은,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신 장면, 신을 받아내는 고통,
무언가를 본 사람만이 가진 눈빛. 그녀는 영적인 인물임에도 현실적인 감정을 담아내면서
극의 중심을 지탱했다.
이도현도 조용하지만 힘 있는 연기로 팀의 일원으로서 존재감을 발휘했다.
감정의 폭은 크지 않지만, 점점 변화하는 눈빛이 기억에 남는다.
느낀 점
《파묘》는 보면서 온몸이 얼어붙는 순간이 많았지만, 보고 나서 더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영화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설 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지금, 죽은 자에게 너무 무례한 시대를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개발로 묘를 밀고, 집터를 바꾸고, 조상의 흔적을 지우는 현대 사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비과학적’이라며 무시하는 시선. 하지만 영화는 말한다.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우리가 믿지 않을 뿐이다.”
그 말이 영화 속 캐릭터가 한 대사였는지, 아니면 내 마음속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숙연함을 느꼈다.
《파묘》는 단지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하나의 경고이자, 우리가 잊고 있던 존재에
대한 예의를 상기시켜 주는 이야기다.
공포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꼭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귀신보다
더 무서운 우리 자신의 무지와 교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